얼마 전 대구에서 K-창작오페라 '운수 좋은 날'이 무대에 올랐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출발했지만, 원작의 줄거리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작품은 아니었다. 같은 제목 아래 한 예술가가 살아온 시간과 기억을 새롭게 엮어 오늘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게 한 작품이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여자 주인공 아미 역을 맡아 노래했다. 연습과 공연을 거듭하면서 이 오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게 되었고, 작품을 바라보는 마음도 점차 달라졌다.
대본가이자 작곡가인 박지운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작품 속에 깊이 담았다. 어린 시절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보았던 풍경, 신천 주변에서 뛰놀며 간직한 기억, 가족과 이웃의 모습, 그리고 IMF 외환위기 시절을 지나며 겪었던 삶의 무게가 이야기의 바탕이 되었다. 현진건의 원작이 지닌 가난과 가족, 사랑과 비극이라는 정서를 토대로 삼되, 인물과 사건은 자신의 경험과 시대의 기억을 바탕으로 새롭게 재구성했다.
유학 시절 작곡해 두었던 아미의 아리아와 ‘키리에’ 같은 음악도 오랜 시간 잠들어 있다가 이 작품을 통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어린 시절의 골목길과 고향의 냄새, 힘겨웠던 시대의 기억, 타국에서 써 내려간 음표들이 서로 다른 조각처럼 흩어져 있다가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한 편의 오페라 안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그 과정을 들으며 나는 예술이란 결국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조각을 꺼내어 새로운 의미로 연결하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순간을 지나친다. 어린 시절 걸었던 길, 부모님의 목소리, 처음 꿈을 품었던 날,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이별, 실패와 좌절, 다시 일어났던 순간들이다. 그때에는 그저 평범한 일상이거나 견뎌야 할 현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그 모든 장면은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소중한 재료가 된다.
작곡가에게 어린 시절의 신천과 IMF 시절의 기억이 오페라가 되었듯이, 소설가에게 거리의 풍경과 사람들의 삶은 문학이 된다. 화가에게는 오래된 집의 창문과 빛이 그림이 되고, 성악가에게는 자신이 겪은 사랑과 슬픔, 기다림과 상처가 노래의 깊이가 된다.
예술은 전혀 없는 것을 갑자기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다.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지만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기억과 감정을 발견해 음악과 문학, 그림과 무대라는 새로운 언어로 세상에 건네는 일이다.
나 역시 오랜 세월 노래하면서 같은 곡도 삶의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르게 불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은 날에는 악보에 적힌 음과 가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면, 지금은 그 음표 사이에 숨어 있는 한 인간의 기다림과 상처, 희망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예술가가 살아온 시간이 깊어질수록 그의 노래에도 지나온 삶이 스며든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도 그 안에 담긴 인간의 감정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장소는 달라져도 가족을 지키고 싶은 마음, 가난 앞에서 느끼는 절망, 사랑하는 사람에게 끝내 다 전하지 못한 미안함은 달라지지 않는다.
박지운은 그 보편적인 감정 위에 자신의 삶을 올려놓았다. 오래된 문학작품과 개인의 기억이 만나 새로운 이야기와 음악을 탄생시킨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문학을 만나고, 음악을 만나고, 무대와 배우를 만나면서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로 확장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많은 사진과 영상을 남긴다. 그러나 수많은 기록 속에서도 정작 한 사람이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견디며 살아왔는지는 쉽게 사라진다. 우리가 기록해야 할 것은 얼굴과 사건만이 아니다. 그 사람이 지나온 길과 그 길 위에서 품었던 마음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누구나 한 편의 소설이 있고 한 곡의 음악이 있다. 유명한 사람의 삶만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을 위해 묵묵히 살아온 부모의 시간, 작은 가게를 지켜 온 상인의 성실함,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한 기업인의 용기, 시대의 어려움을 견디며 살아온 평범한 이들의 삶도 충분히 문학이 되고 음악이 될 수 있다.
대구에서 《운수 좋은 날》을 노래하며 다시 깨달았다. 예술은 삶과 멀리 떨어진 특별한 세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온 시간과 마음속 깊이 묻어 둔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꺼내는 순간, 삶의 작은 조각들은 음악이 되고 문학이 되며 새로운 예술로 태어난다.
삶은 흘러가지만, 그 삶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는 예술이 되어 오래도록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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