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은 1967년까지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정부 수립 후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의 청사가 서울시에 자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화성군청도 1970년까지 수원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화성역이라는 버스정류장은 화성군청과 협괘열차 수여선, 수인선의 출발점과 연관성이 있는 줄 압니다. 화성군청이 수원에 자리한 이유는 행정적 인프라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식당, 문방구, 설계사무소, 건설사 등 행정과 관련이 깊은 시설이 화성군 관내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1970년 6월에 화성군청을 오산읍으로 이전했는데 지리적으로 오산읍은 동남부에 위치하였지만 행정적 인프라를 검토하여 군청청사를 이전한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이후 2000년 11월 남양으로 화성군청 청사를 이전했습니다. 팔탄면과 경합을 벌였습니다.
비슷한 사례는 양주군청입니다. 양주군청은 과거에 청사를 의정부에 두었습니다. 현재도 옹진군청은 인천광역시에 있습니다. 옹진군은 연평, 백령, 대청, 덕적 등 섬으로 구성되었으므로 행정의 효율성 증진과 건설사, 식당, 인쇄소 등 행정 인프라 확보를 위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120(용현동)에 청사를 두고 있습니다.
100년 전, 1926년 8월 1일 경기도 용인군 읍삼면 중리, 현재의 기흥구 중동 내촌마을에서 훗날 7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병희 국회의원이 출생했습니다. 2026년은 백웅(白雄) 이병희 탄생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97년에 별세했습니다.
삼일중학교, 육군사관학교(8기),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후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였습니다. 5.16 군사정변 직후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김종필이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1962년 대령으로 예편한 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했습니다.
이즈음 서울 광화문에 있던 경기도청을 경기도로 이전하자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천, 안양, 수원 등이 경합을 하던 중 인천으로 도청을 이전하자는 의견에 무게가 실리자 이병희 국회의원은 삭발까지 감행하면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 광화문 앞에 있던 경기도청을 수원시로 이전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1963년에 법률 제1538호가 제정되어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이 결정되었고 1967년에 팔달산 중턱에 경기도청을 준공하고 이전하게 됩니다. 당시 경기도민은 289만 명이었고 청사건립비는 15억원입니다.
아마도 1910년부터 서울 소재 경기도청에서 성장한 측백나무가 있었습니다. 1967년 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하고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가 2017년경 서울시의 개발계획으로 베어내거나 이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과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의논하여 경기도 광교역사박물관 정원으로 이식했습니다.
팔달산 도청시절 정문을 철거하면서 보존된 경기도청(박정희 대통령 친필)과 경기도의회(김영삼 대통령 친필) 현판과 함께 광교 경기도청사 좋은 자리에 이식하고 설치하기를 기대합니다. 이병희 의원 등 당시의 지도자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경기도청은 인천시로 이전했을 것이고 14년 후인 1981년에 인천직할시(광역시)로 승격 분리되었으니 또다시 청사를 경기도로 이전해야 하는 행정적,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면서 일거에 경기도청을 서울에서 수원시로 이전한 것은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평가합니다.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은 물론 이병희 의원은 기업과 대학 유치에도 큰 공적을 이룩했습니다. 수원시에 삼성디지털시티를 유치하는 데도 공을 세웠습니다. 오늘날 수원시가 경기도 관내 최대 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기초를 다진 것입니다.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만석공원에 그의 동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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