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행윤칼럼] 호흡하는 공기 없앨 수 없듯…경기방송 반드시 재개돼야

도민들 위한 소중한 주파수, 어떠한 정치논리로도 왜곡될 수 없어

허행윤기자 | 기사입력 2020/04/03 [11:37]

[허행윤칼럼] 호흡하는 공기 없앨 수 없듯…경기방송 반드시 재개돼야

도민들 위한 소중한 주파수, 어떠한 정치논리로도 왜곡될 수 없어

허행윤기자 | 입력 : 2020/04/03 [11:37]

 라디오란 말만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마니아가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밥은 굶고 살 수 있어도, 라디오 방송 없이는 단 1초도 지낼 수 없다고 늘 혼잣말로 주억거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에겐 ‘라디오 방송의 황제’란 별명이 붙었습니다.

 

누구의 프로필이냐고요? 할리우드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주인공 에이드리언 크로나워(로빈 윌리엄스 분)가 그랬다는 얘기입니다.

 

지금부터 영화 속으로 잠깐 들어가 보겠습니다.

 

베트남에 주둔했던 미군들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방송국에 DJ로 부임한 크로나워는 이미 그의 명성을 알고 있던 방송국 지휘관과 동료 DJ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습니다. 하지만 딱딱하고 고집이 센 선임 부사관은 그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크로나워는 들뜬 분위기로 사이공(현 호치민)에서도 그의 장기를 살려 웃기는 방송을 진행합니다. 하지만 정작 전쟁터인 사이공은 처참합니다. 혼을 담아 개그 방송을 하지만 검열이 너무 철저해 잔인한 현실을 방송에 내보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무표정하게 검열을 지시하는 검열관 쌍둥이 형제에게 온갖 애교도 부리지만, 이들은 군법대로 하라면서 검열을 깐깐하게 지시할 뿐입니다.

 

크로나워는 이 같은 상황에서도 베트남 전쟁을 만담으로 풍자해 에둘러 비판합니다. 이런 와중에 베트남 사람들을 위한 영어회화 수업을 맡으면서 베트남 처녀와의 사랑도 꿈꾸기도 합니다.

 

처녀의 남동생인 베트남 소년과 친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베트콩이었습니다. 그 소년도 크로나워와 친해져 크로나워를 두 번씩이나 구해주기까지 합니다. 그것도 총을 든 동료들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자칫하면 배신자로 몰려 잡혀 총살당할 위험까지 각오하고 구해줍니다.

 

제가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서울 시내가 군부독재에 맞서는 대학생들의 시위로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자욱했던 198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도 인상적이었지만, 비록 픽션이었지만, 영화 속 베트남에서 한국의 암울했던 현실이 오버랩 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느꼈던 사이다보다 더 시원했던 페이소스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흘러 나왔던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도 그렇구요.

 

크로나워는 베트남이라는 전쟁터에서 담담하게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미군 병사들과 고통을 받는 베트남인들의 모습과 전쟁의 처참함을 관객들에게 담담하고 잔잔하게 전달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라디오 음악방송을 통해서 말입니다. 당시 베트남에서 전쟁을 수행하던 미군들에게 크로나워가 진행하는 방송은 끊임없이 들숨과 날숨으로 들어 마시고 내뱉었던 산소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전쟁터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안식이었습니다.

 

제가 생뚱맞게 유명한 반전영화를 언급한 까닭은 22년의 연륜을 갖춘 한 지역 라디오방송인 경기방송의 안타까운 폐업 소식 때문입니다.

 

그 경위야 어떻든 간에 이 방송사는 방통위로부터 조건부 재허가를 받았던 건 팩트입니다. △특정 임원 경영에서 배제 △대표이사∙사외이사∙감사 등을 공모로 진행 △편성 독립성 강화 등 경영개선계획서 제출 △지자체 협찬 및 행사를 매출액 대비 50% 이하로 감축 등이 조건들이었습니다. 지난해 연말이었습니다.

 

앞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간부가 사석에서 대통령에게 막말을 했다거나, 청와대 출입기자가 기자회견 중 질의를 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에게 예의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거나 하는 디테일 때문에 정권에 밉보인 게 아니냐는 관측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측은 그러자 지난 2월20일 긴급이사회를 열고 지상파 방송허가를 반납, 회사를 폐업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사회는 노사갈등, 매출감소, 방통위 경영간섭 등을 이유로 폐업을 결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기방송 관계자는 “지난해 8월 특정 임원의 발언이 폭로되면서 잦은 내분에 회사의 성장 동력이 완전히 상실된 데다 도의회의 보복성 예산삭감, 외부세력과 노조의 인사개입 등으로 회복 불가능 상태에 빠져 폐업을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도의회도 의견을 냈습니다. 도의회 관계자는 “경기방송·서울교통방송·경인방송 세 곳에 교통 방송 사업비로 연간 12억 원을 나눠 지원하던 것을 올해 예산에서 전액 삭감했다”며 “3~4년 전부터 재정 사업 평가에서 일몰 의견이 제시된 데 따른 것으로 정치적인 이유는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언론계 입장은 사측과는 결이 사뭇 다릅니다.

 

한국기자협회는 최근“분노를 넘어 허탈함을 금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한국기자협회의 성명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방송사가 사적 영역인 자본의 논리를 앞세워 공적 영역인 도민들의 청취권을 마음대로 빼앗아간 것과 다름없다. 그동안 도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경기방송이 도민들을 위한 마지막 보답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사업자가 나타날 때까지 방송시설 이용 등 방송 재개와 지원을 위한 노력을 촉구한다. 방송통신위원회도 법 개정을 통해 경기방송 구성원들에 대한 지원은 물론 경기방송과 같은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정비해주기 바란다. 하루빨리 경기도와 도민들을 사랑하고 방송의 의무를 준수하며 언론의 소명을 다할 수 있는 새 사업자가 인수할 수 있도록 관련 부처와 경기방송 구성원 모두가 함께 노력해주길 요청한다.”

 

방통위도 “경기 도민의 청취권 보호를 위해 새로운 사업자가 선정될 때까지 방송 유지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안타까움을 표명했습니다.

 

현행 방송법에 따르면 방송사업자가 폐업하려면 방통위에 방송사업 허가증을 첨부해 폐업신고서만 내면 됩니다. 방통위 관계자는 “방송사업자가 폐업을 결정할 경우 방통위는 저지하거나 보류할 법적인 근거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방송 사업은 허가사업인 만큼 허가권자인 방통위가 사업자의 존폐를 결정해와, 이번처럼 방송사업자 스스로 폐업을 선언할 경우에 대비한 저지 규정은 마련돼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기방송 사태와 관련, 다시 한 번 정확하게 앞뒤 맥락을 짚어 보겠습니다. 그동안 도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방송사의 폐업이기 때문입니다.

 

경기방송이 방송사업 폐업을 결의한 건 지난달 이사회에서였습니다. 방통위가 당초 지난 연말 조건부 재허가를 결정했지만, 경기방송 이사회는 이를 거부하고 폐업을 결의한 것입니다. 지난 3월16일 열린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선 폐업 안건이 99.97%의 찬성으로 통과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해를 살만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이 방송사 출신 기자가 자신 때문에 재허가권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면서 정치권에 입문했기 때문입니다. 해당 기자는 모 야당 선거대책위 대변인으로 영입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정권의 언론 탄압에 저항하기 위한 폐업’이란 프레임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는 관측도 야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방통위는 “경기방송에 대한 재허가 심사는 법률, 경영, 회계 등 외부전문가가 참여하는 심사위를 거친 후 이를 바탕으로 방통위가 의결하는 절차로 진행됐다”며 “(이 과정에서) 해당 기자의 (무례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은 바 있는) 질문은 검토되거나 논의된 바 없다”고 밝혔습니다.

 

방통위는 이를 입증하듯, 같은 날 보도전문 방송채널사용사업자인 ㈜와이티엔, ㈜연합뉴스티브이의 재승인을 의결했습니다. 종합편성채널인 ㈜조선방송과 ㈜채널에이 등에 대해선 방송의 공적책임ㆍ공정성, 편성ㆍ보도의 독립성 강화 등을 위한 계획을 확인 후, 재승인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건 사실 경기방송 직원들입니다. 이들도 방송 살리기에 나섰습니다.

 

직원들은 최근 발표한 성명을 통해 “PD, 기자, 엔지니어, 그리고 DJ와 작가 등까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를 깨뜨린 건 흐느낌에 이어 갑자기 터져 나온 오열”이라고 마지막 방송을 지켜본 심정을 전한 뒤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청취자를 배반하고 ‘먹튀’하는 방송사업자가 나타나서는 안 되기에, 견디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방통위가 먹튀 방송 금지법을 만들겠다고 하니, 그 일을 경험한 저희가 함께 하겠다. 방통위가 새 사업자를 찾겠다는 의지를 밝혀, 이를 믿고 임직원들은 방송이 다시 시작될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방통위도 귀중한 주파수이고 공공재이기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새 사업자를 찾겠다고 밝혔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마지막 방송을 지켜보면서 굉장히 뭉클했고, 정말 안타까웠다. 하루 빨리 건실한 새 사업자가 나타났으면 한다”며 의지를 다졌습니다.

 

김봉균 도의회 문화체육위 소속 도의원 등 몇몇 도의원들도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김 의원은 “방송은 소중한 공공재인데 사업자가 임의로 폐업한 처사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교통방송이 서울 시민들을 대상으로 재난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경기방송도 도민들을 위한 소중한 방송이다. 지분 참여도 30%까지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방송의 공적인 영역을 도가 도와줘야 한다. 99.9㎑라는 주파수를 도민들을 위한 전파로 살려야 한다. 경기도가 참여할 수 있는 우선권이 부여될 수 있도록 시민단체와 민언련 등과 함께 도민의 목소리를 담아 방통위에 건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방송은 모름지기 소중한 공공재(公共財)입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산소와 같은 자산입니다. 경기방송 방송이 반드시 재개돼야 하는 까닭입니다. 정치적인 프레임을 떠나 다시 도민들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영화 <굿모닝 베트남>에서 크로나워가 에필로그를 통해 외쳤던 것처럼 말입니다. “라디오 방송은 애청자들의 핏줄에 흐르는 피란 말입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멈춘다면 그들은 이 벅찬 삶을 살아낼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허행윤 수원화성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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