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군 칼럼] 정조의 고향, 수원의 느릅나무 이야기

자연에게 길을 묻다! 화산 최재군 나무의사가 들려주는 인문학 강좌 14

최재군 | 기사입력 2025/10/10 [16:00]

[최재군 칼럼] 정조의 고향, 수원의 느릅나무 이야기

자연에게 길을 묻다! 화산 최재군 나무의사가 들려주는 인문학 강좌 14

최재군 | 입력 : 2025/10/10 [16:00]

▲ 화산 최재군     ©수원화성신문

 

우리 산야에는 느릅나무, 참느릅나무, 비술나무가 자생하며 모두 한 가족에 속한다. 특히 느릅나무는 잔가지가 힘없이 늘어지는 독특한 모양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이들은 주로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 근처에서 잘 자라며, 높이 15~25m에 이르는 큰 키의 낙엽수이다. 느릅나무의 잎은 타원형이거나 윗부분이 넓은 도란형으로, 가장자리에 촘촘한 겹톱니가 있다. 예로부터 잎과 껍질을 떡 반죽에 섞어 먹었기 때문에 ‘떡느릅나무’라고도 불렸다. 같은 속에는 ‘진짜 느릅나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참느릅나무와, 열매의 날개 모양이 닭의 볏을 닮아 ‘닭벼슬나무’ 또는 ‘벼슬나무’로 불리는 비술나무가 있다.

 

▲ 느릅나무잎과 수피(출처 :국립생물자원관)     ©수원화성신문

 

구황(救荒)과 약재, 백성을 살린 느릅나무

느릅나무는 소나무, 상수리나무와 함께 민초의 굶주림을 달래 준 대표적인 구황식물이다. 고구려 온달장군이 느릅나무 껍질을 채취했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구황식물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선조들은 껍질 속을 물에 풀어 전분을 얻어 허기를 달랬다.

 

중국 의학서 『본초강목』에는 느릅나무의 활용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껍질 가루를 곡식 가루와 섞어 기름에 지져 떡처럼 만들면 껍질이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어 기근 속에서도 배고픔을 견디게 한다. 껍질을 삶아 가루로 내어 곡식과 함께 죽을 쑤면 영양 보충과 장 건강에 이롭다. 또한 열매를 씻어 말린 뒤 볶아 찧어 짜낸 기름은 음식 조리뿐 아니라 보습과 회복에도 효과가 있어 상처 치료에도 쓸 수 있다.”

 

 

▲ 참느릅나무(좌)와 비술나무(우) 잎     ©수원화성신문

 

『산림경제』에도 "느릅나무 껍질은 흉년에 사람의 양식이 될 수 있다. 흰 껍질을 채취하여 찧어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 먹는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또한, 느릅나무 열매를 씻어 하루 밤낮을 담근 뒤 여뀌(수초의 일종) 즙을 뿌려 말리기를 일곱 차례 반복하고 메주 띄우듯 장을 담가 유인장(楡仁醬)이라 부르기도 했다. 느릅나무는 귀한 약재로도 쓰였다. 껍질을 말려 잘게 부수어 달여 마시면 갈증 해소, 해열, 해독 작용을 했으며, 설사, 종기, 부스럼 등에도 효험이 있었다.

 

건축 재료로 인정받은 고급 목재

느릅나무는 귀한 건축자재로도 인정받았다. 신라시대에는 나라에서 규제하여 4두품 이하의 계층은 건축자재로 사용할 수 없도록 했는데, 이는 느릅나무가 고급 자재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느릅나무는 삼화토(三和土) 제조에 필수적으로 쓰였다. 삼화토는 석회, 세사, 황토를 고르게 섞어 느릅나무 삶은 물로 반죽해 만든 것으로, 현재의 콘크리트와 유사하며 삼물(三物) 또는 강회(剛灰)라고도 불렸다. 느릅나무 삶은 물의 점액질은 삼화토의 방수성과 접착력을 높여주어, 왕릉 석실 내부의 습기와 결로를 막는 역할을 했다. 세종 28년(1446년) 왕릉을 조성하는 산릉 공사에서도 그 중요성이 명시될 만큼 핵심 재료로 다뤄졌다. 이는 풍수지리에서 물이 무덤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꺼린 전통 신념과도 연결된다. 정약용 역시 『목민심서』에서 곡산부 정당의 기초를 삼화토로 다진 뒤, “20여 년이 지나도 흔들림이 없다”라고 극찬하며 그 견고함을 높이 평가했다.

 

▲ 참느릅나무(좌)와 비술나무(우) 수피     ©수원화성신문

 

정조의 이상향, 수원 '분유사(枌楡社)'의 상징

평민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한나라 유방(劉邦)은 효심이 깊고 고향을 소중히 여긴 인물이었다. 그는 수도 장안에 자신의 고향인 패현(沛縣) 풍읍(豐邑) 중양리(中陽里)와 똑같은 마을을 세워 아버지를 모셨다. 또한 고향에서 토지신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인 ‘분유사(枌楡社)’를 설치하였다. 느릅나무 두 그루를 심은 분유사는 양과 돼지를 바치며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고, 이후 제왕의 고향이나 왕조의 발상지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정조는 유방의 고사를 본받아 수원을 분유사라 칭했다. 그는 수원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며, 언젠가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여생을 보낼 도시로 생각하였다. 이에 행궁의 정문은 유방의 고향 풍읍에서 ‘풍(豐)’ 자를 따와 신풍루(新豐樓)라 하고, 내삼문은 중양리의 지명을 빌려 중양문(中陽門)이라 이름 지었다. 또한 행궁 후원에는 노년에 한가로운 여가를 보내고자 육각 정자 미로한정(未老閒亭)을 세웠다. 분유사는 수원화성의 장안문과 창룡문 상량문에도 언급되어 있어, 정조가 수원을 얼마나 특별하고 중요한 도시로 여겼는지를 잘 보여준다.

 

▲ 신풍루와 미로한정(출처/https://gallica.bnf.fr)     ©수원화성신문

 

정조는 ‘분유사(枌楡社)’라는 세 글자를 자주 인용하며 각별한 의미를 두었다. 1790년, 그는 직접 분유사를 주제로 한 칠언고시(七言古詩) 시험을 치렀는데, 이때 정약용이 세 차례 연속으로 뛰어난 글을 지어 모두 1등을 차지하였다. 정조는 이 시험을 계기로 정약용의 재능을 깊이 인정하고 큰 신뢰를 보냈으며, 이는 훗날 정약용이 조선 실학의 거목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임금과 신하의 특별한 인연은 바로 느릅나무에서 비롯된 것이다.

 

 

▲ 융릉의 참느릅나무     ©수원화성신문

 

융릉의 느릅나무

단풍이 물들 무렵 찾은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隆陵)의 홍살문 우측에는 허리를 굽힌 참느릅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나무의 형상은 마치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를 향해 예를 갖추는 듯하다. 이 참느릅나무는 비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아픔을 위로하고 효를 다하고자 수원화성을 건설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려 했던 정조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수원에서 느릅나무, 즉 분유사는 정조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상징 수목이다. 제단에 심기는 느릅나무는 단순한 나무를 넘어 수원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시목(市木)인 소나무 못지않게 깊은 의미를 지닌 느릅나무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며 가뭄과 폭염에 강하고, 습지에도 잘 견뎌 이름처럼 ‘물의 근원’이라는 뜻을 가진 수원(水原)과 잘 어울린다. 분유사에 심긴 느릅나무는 곧 정조의 이상과 수원의 정신을 함께 새기는 상징인 셈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느릅나무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프로필

- 수원특례시 공원녹지사업소장

- 조경기술사

- 자연환경관리기술사

- 문화재수리기술자(조경)

- 문화재수리기술자(식물)

- 나무의사, 수목보호기술자

- 경기도시공사 기술자문위원

- 조달청 평가위원

- 왕의정원 수원화성(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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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위지기 2025/10/12 [14:01] 수정 | 삭제
  •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비술나무(Ulmus pumila) 느릅나무(U. davidiana var. japonica) 참느릅나무(U. parvifolia) 구분이 어려워 잎의 엽연의 거치, 꽃의 개화시기, 종자의 형태 등 쉽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자꾸 헷갈리는 식물입니다^^ ㅎ
  • 참누리 2025/10/11 [16:38] 수정 | 삭제
  • 수원 화성하면 정조를 떠올리게 되는데 정조와 느릅나무의 연관성은 처음 알게 되었네요~ 융릉에 가면 느릅나무 찾아봐야 겠어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화서랑 2025/10/11 [15:20] 수정 | 삭제
  • 좋은 정보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행복 2025/10/11 [11:33] 수정 | 삭제
  • 느릅나무의 이야기 너무 신기하고 재밌네요~ 특히 정조대왕과 정약용의 인연에 느릅나무가 연관되어있다는 게 인상 깊습니다. 항상 유익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감사드립니다^^
  • 트니맘 2025/10/10 [17:21] 수정 | 삭제
  • 융릉 느릅나무에 그런사연이 있는지 몰랐네요~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 김단분 2025/10/10 [16:43] 수정 | 삭제
  • 멋있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되었습니다
  • 채수기 2025/10/10 [16:16] 수정 | 삭제
  • 깊고 넓은 지식을 배워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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