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이런 말이 회자(膾炙)됐던 적이 있었습니다.“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입니다.”지난 1990년대 당시 세계로 막 힘차게 도약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고(故) 김영삼 대통령이 남긴 어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IMF 한파를 맞기 전까지는 그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당차고 자신감이 녹여져 있기도 했습니다.
이 워딩의 의미를 좀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세상은 보편성으로서만 승부되는 게 아닙니다. 모름지기 사람의 눈과 입과 귀 등을 사로잡는 건 개성입니다. 예컨대, 어떤 건축양식이나 음식 등에 개성이 있다면 그것은 곧 특성이고, 그 자체가 세계 속에서 세계인들의 마음속에서 행복한 믿음으로 자리를 잡기 마련입니다.
좀 형이상학적인가요?
다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세계가 하나의 마을처럼 가까워졌습니다. 비행기를 타면 하루 안에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도 훌쩍 날아갈 수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세계 여러 나라 소식들을 바로 접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세계 곳곳이 하루생활권으로 좁혀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난 1917년 스페인에서 독감 바이러스가 창궐했습니다. 그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전파되기 까지 2~3년 정도가 걸렸답니다. 당시는 지구 건너편 나라로 가려면 아무리 빨라도 꼬박 서너 달이 넘게 걸리던 시절이었습니다.
현재는 어떻습니까?
지난해 연말 또는 지난 1월 중국 우한(武漢)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른 나라들로 전파되는 데 채 열흘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세계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세계화는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서로 주고받게 되는 변화를 일컫는 개념입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구가 하나의 마을처럼 가까워지면서 세계화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촌(地球村)이라는 단어도 생겼습니다. 그만큼 세계화는 우리 삶을 바꿔주고 있습니다. 세계화로 전 세계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나라 간에 물건을 사고 파는 무역도 자유로워져 다른 나라에서 만든 물건을 쉽게 사서 쓸 수 있습니다. 물론 국내에서 만든 물건도 외국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물건은 물론, 유행이나 문화 등도 전보다 쉽게 퍼지게 됐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영화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도 바로 세계화의 한 모습입니다.
물론 세계화가 꼭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닙니다. 경제 분야가 세계화되면서 경쟁이 심해져 가난한 나라는 점점 가난해지고, 부유한 나라는 점점 부유해지는 등 문제점도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각 나라와 지방 고유의 문화가 파괴되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코로나19 등 예전 같지 않은 전염병의 무서운 확산 속도도 큰 문제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은 그래서 그 의미가 심오합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 무역과 경제 대국 반열에 들어선 지금은 우리나라의 유·무형적인 것들이 ‘지구촌’인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세계적인 것들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BTS 등 K-Pop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등 대중문화도 세계적인 브랜드로 이미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문화도 세계화라는 카테고리에 연착륙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세계화의 범위를 수원에 남아있는 전통문화로 좁혀 보겠습니다.
수원에는 정조대왕 시대 농업개혁의 산실이자 이 시대 축조된 인공저수지로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담은 축만제(祝萬堤)와 ‘만석의 쌀을 생산하라’는 뜻의 만석거(萬石渠) 등이 있습니다. 각각 경기도기념물 제200호와 수원시 향토유적 제14호 등으로 등록된 유형 문화재들입니다. 이 문화재들이 60여 년 만에 제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그동안은 일왕저수지와 서호 등으로 불렸습니다. 수원 시민들은 물론 세계인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입니다.
수원시는 최근 국토지리정보원 고시(제2020-1130호)에 따라 일왕저수지와 서호 등의 명칭이 원래 이름인 축만제와 만석거 등으로 공식 변경됐다고 밝혔습니다.
만석거와 축만제는 수원화성 축조 당시 가뭄이 들자 정조대왕이 안정된 농업 경영을 위한 관개시설로 지난 1795년 지금의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305에 만석거, 지난 1799년 현재의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436의 1에 축만제 등을 조성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했던 시설들로 <화성성역의궤>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축만제는 이후 수원 화성의 서쪽에 위치하면서 지난 1831년(순조 31년) 항미정(杭眉亭) 정자 건립 시, 소동파의 시구에서 항미정 명칭을 따오면서 일명 ‘서호(西湖)’라고 오랫동안 불려왔습니다.
만석거도 일왕저수지, 조기정 방죽 또는 북지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지난 1936년 수원군 일형면(日荊面)과 의왕면(儀旺面) 등이 합쳐져 일왕면(日旺面)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일왕저수지로 불렸습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 1961년 국무원 고시 제16호에 의해 두 저수지의 법적 명칭이 ‘일왕저수지’와 ‘서호’등으로 제정되면서 60여 년 동안 공식적인 이름으로 사용됐습니다. 제 이름을 잃고 남의 이름으로 살아온 셈입니다.
수원시는 이 같은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두 저수지의 역사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 명칭 정정을 추진, 원래의 지명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명칭 변경은 수원시 지명위원회와 경기도 지명위원회 등의 심의·가결 등과 국가지명위원회 등 1년여의 과정을 거쳐 최근 국토지리원 고시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다만, 국가지명위원회는 지명표준화의 제1원칙(1객체 1지명)에 따라 공문 등 법적 문서에선 ‘축만제(서호)’와 같은 병기는 지양하지만, 일반적으로‘서호’라는 지명은 별칭으로 사용이 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애민 정신이 담긴 수원시의 정체성을 찾은 건 확실합니다. 후손들이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이웃인 세계인들도 분명 반길 일입니다.
두 저수지는 관개 시설물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16년과 2017년 ICID(국제관개배수위원회)의‘세계 관개 시설물 유산’으로도 등재됐습니다.
지구촌 세계인들에게 소개할 게 또 있습니다.
정조대왕이 수원화성과 장용영 군사의 모습을 보고 지은 시를 새긴 ‘어제화성장대시문((御製華城將臺詩文)’현판이 복원돼 서장대에 올려졌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의 현판 9개도 원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새로 복원한 ‘어제화성장대시문’현판은 정조대왕이 지난 1795년 서장대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하고, 수원화성과 장용영 군사들의 위용에 만족감을 표현한 시를 새겼습니다.
서장대는 수원화성에서 유일하게 어제(御製:왕이 지은 글)와 어필(御筆:왕이 쓴 글씨) 등이 함께 게시된 건축물로 수원화성에서 가장 격이 높습니다. 화성장대 현판 글씨는 정조대왕이 직접 썼습니다.
수원시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현판 원본을 복제한 뒤 <화성성역의궤> 기록에 따라 잣나무를 사용했고 고증 결과에 따라 바탕은 하얀색, 글자는 검은색 등으로 각각 칠했습니다.
“왕의 시문 현판은 높은 위계의 칠보문(七寶紋)을 작용하는 게 타당하다”는 전문가 의견에 따라 테두리에 칠보문을 그렸습니다. 시문 현판은 원래 서장대 2층에 걸려 있었지만, 시민들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1층에 걸었습니다.
수원화성의 팔달문·장안문·화서문·창룡문·화홍문·화성장대·연무대·방화수류정·화양루 현판은 보수 작업을 거쳐 원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지구촌이 코로나19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21세기 들어 세 번째로 들이닥친 전염병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서 체득한 지혜입니다.
이제 세계는 이웃입니다. 수원화성과 축만제, 만석거 등은 그래서 수원 시민은 물론, 세계인들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입니다. 그래서 온전하게 보존하고 지켜야 합니다.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우리의 의료시스템과 방역시스템 등에 대한 세계인들의 긍정적인 평가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시 우리의 이웃인 세계인들이 공유해야 할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그렇게 같이 호흡하고 있습니다.
허행윤 수원화성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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